울리히 츠빙글리 (1484~1531)

 
<목차>
놀라운 체험
어린 나무
놀라운 체험기
개혁의 물결
용별제도의 폐단
재세례주의자와의 결별
전쟁
흑사병을 이기다
잠깐 거두어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용별제도의 폐단

목사로 첫 부임했던 지역인 글라루스에 있을 때 츠빙글리는 이미 스위스 인문주의자 그룹에서도 비중이 큰 일원이 되었다. 에라스무스와도 개인적인 친분을 갖게 되는데, 츠빙글리가 종군 목사 신분으로 이탈리아 용병으로 가 있으면서 서신을 왕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몇차례에 걸진 출정으로 그는 용병제도의 비도덕성이며 폐단을 깨닫고 용병제도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저술인 「황소의 우화」는 용병제도의 위험성을 경고한 작품이다. 이로 인해 스위스나 스위스와 조약을 맺고 있던 프랑스는 그를 미워하여 글라루스에서의 목회를 방해했다. 츠빙글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막을 것이며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였기에 정부로부터 오는 그런 핍박이 그를 위축시키지 못했다.

그는 10년 동안 시무로 오던 글라루스를 떠나 1516년 11월에 인문주의의 보루요 순례의 중심지인 아인지델른으로 가서 사제직을 계속했다. 그는 여기서도 용병제도의 악폐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여전히 늦추지 않았다. 성경에 비추어 교황 권위의 부당성과 면죄부 판매를 적극 반대하는 운동을 폈다.

헬라어와 문학에 박식했던 그는 헬라 고전을 공부하고자 자기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중 시의회의 고위 의원 자제인 콘라트그레벨이라는 젊은이도 끼어 있었다.

훗날 이 그레벨과 손잡고 재세례주의 선각자가 된 팰릭스 만츠는 먼저 와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의 젊은 인문주의자들은 학문을 사랑하고 에라스무스를 존경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해 그는 그들에게 헬라어 신약성경을 소개하며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에 대해서 도마질을 했다. 그레벨은 츠빙글리의 강의에 열심이었고 또 실지로 열성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한 지 3년이 되자 그레벨의 신념은 츠빙글리의 신념을 능가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같이 뜻을 모아 길을 걸을 만한 이유가 하등에 없었다. 나중에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짜놓은 규범과 허례를 뒤엎어서 한다는 등의 가장 근본적인 공통점마저도 방법상,시간상 의견이 맞지 않아 돌아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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