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틴 루터 (1483~1546)

 
<목차>
의인은 믿음으로
어린 루터
청년 루터
생사의 갈림길
죄인 루터
슈타우피츠
로마 순례
속죄의 계단에서
면죄부
폭풍은 몰려오고
싸움은 시작되다
에크 대 루터
분노의 필봉
보름스 의회
나의 생을 바치나이다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폭풍은 몰려오고

루터는 속죄권 판매의 큰 책임을 맡고 있는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도 95개조 선언문을 보냈었다. 덧붙여 대주교에게 루터는 진실과 용기를 가지고 충고했는데, 즉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복음이라는 것과 속죄권의 판매 대리 테첼을 그릇 지도하지 않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와 교황은 다fms 황제나 영주처럼, 유럽의 대부호 야곱 푸겔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양심선언이 달가울 리 없었다. 오히려 속죄권을 팔아서라도 빛을 청산하려는 속셈이었다.

실제로 판매수익금의 절반은 이미 그 부채의 대가로 푸겔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다시 없는 이 좋은 기회를 그들이 놓칠 성싶은가? 이단의 소리가 더 퍼지기 전에 이 수도사를 처단해야 했다.

그는 로마로 루터의 선언문을 보내고 파문교서의 발부를 요청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즉각 전갈이 왔다. 60일 이내로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라는 것이었다. 단순히 대화와 각성을 위해서 작성되었던 선언문 때문에 그는 목숨을 걸게 된 것이다. 박해에 직면하여, 자신의 목숨을 포기해야 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아깝지 않은 것이었다.

다행히 루터에겐 비텐베르크의 영주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독신으로 살고 있는 신앙심 깊은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겨 아끼고 있었다. 그즈음 그는 로마의 교황과 정치적으로 묘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호탕한 메디치는 37세에 교황 레오 10세로 등극하고 교황제도를 만끽하면서, 군주로서도 유럽을 한손에 넣으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이 강한 합스부르크 가의 칼이 독일 제국의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지지를 구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은 자연히 선제후가 아끼는 루터를 정면 공격할 수는 없게 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교황의 소환장을 거부했다.

그러나 루터의 선언문은 전국에 퍼지고 속죄권 판매는 날이 갈수록 부진해 갔다. 9월이 되자 교황은 프리드리히에게 사자를 보냈다.

“각하께서 카에탄 추기경에게 루터 박사를 인도할 의무는 없습니다. 난 단지 속죄권에 대한 두 사람을 공개토론케 하고 싶을 뿐입니다.”

당시 공개토론은 학문세계에서 널리 성행하던 일번적인 관습으로서 비교적 폭넓은 의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루터의 둘도 없는 신앙의 친구 멜란히톤은 이 위험한 토론을 알렸다. 그러나 루터는 “아니, 내가 죽더라도 예수는 살아 계시지”라고 했다. 그리고 100년전 존 후스를 한가닥 연기로 만들었던 화형대를 연상하며 아우구스부르크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10월 7일에 도착한 루터는 의회의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멜란히톤에게 “나는 희망과 공포의 중간에 매달려 있다”고 편지했다. 12월이 되자 루터는 푸겔의 저택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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