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후스 (1369~1415)

 
<목차>
점화된 개혁의 불꽃
프라하의 제롬
보헤미안 후스
그 복음 안에서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그 복음 안에서

후스는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1413년 그의 역작 "교회"를 출판하였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그대로 “교회는 예정된 자들로써만 구성되며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교회의 법은 신약성경이요 교회의 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의 생활이여야 한다.”고 말했다.

서부 유럽에는 세 명의 교황이 공존하였으므로 서로간에 불화가 계속되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1414년 콘스탄스 공의회가 수집되었다. 콘스탄스 공의회는 3년 5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1417년 마틴 5세를 이탈리아 추기경으로 선출함으로써 교황청의 대분열은 치유되었다. 또한 보헤미아의 혼란상이 콘스탄스 공의회의 취급 대상에 올랐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는 후스에 대한 신변의 안전을 약속하고서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후스를 공의회에 데려오게 하였다. 황제의 공정한 약속과 보증을 받은 후스는 “나의 모든 것을 나의 구주께 맡긴다. 나는 그가 나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내가 그의 진리 안에 굳게 서게 하여 주실 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유혹이나 옥에 갖히는 일이나 혹 필요하다면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당하겠노라”라고 말하면서 콘스탄스에 갔다.

1414년 10월 15일경 후스는 두바의 웬세스라우스와 존,드,클룸 경과 함께 프라하를 떠났다. 가는 도중에 후스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들과 비밀리에 이야기하기보다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향을 밝혔다. 후스는 아무것도 감추거나 숨기지 않았으므로 저녁식사 후부터 밤이 될 때까지 사제 평의원 및 많은 시민들 앞에서 이야기했다. 11월 3일 콘스탄스에 도착하여 성 게일 거리에 있는 신실한 자라고 불리우는 정직한 과부의 집에 묵었다. 이튿날 존 드 클룸 경과 헨리 라젬보그 경은 교황을 만나 후스의 도착을 알리고 후스의 안전을 요청하였다.

팔레츠와 카우시스는 후스에게 불리한 기사를 작성하여 후스의 저서 특히 교회에 관한 논문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불을 붙였기 때문에 추기경들과 사제들은 크게 분노하여 후스를 체포하였다. 후스는 라인 강 근처의 도미니카 수녀원의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서 학질에 걸려 극도로 쇠약해졌다. 후스를 비난하는 자들은 공의회의 회장에게 그를 정죄하라고 탄원했다. 고발내용을 들은 후스는 변호사를 선임을 요구하였으나, 판사들은 법에 의하면 아무도 이단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을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후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뒤 후스는 두 차례나 감옥을 옮겨 낮에는 발에 족쇄를 채운 채 지냈으므로 거의 걷지 못했고 밤에는 선반에 묶여 지냈다.

후스의 안전을 보장했던 지기스문트는 완강한 주교들 때문에 자신의 약속을 깨뜨렸다. 추기경들과 주교들은 이단 혐의를 받고 있거나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결코 안전통행권이나 다른 조처에 의해 보호받을 수 없다고 했다.
후스가 공의에 소환되어 나갔을 때 후스를 비난하는 자들은 후스를 조롱하고 후스에게 폭언은 퍼부었고, 후스가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하면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으므로 후스는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1415년 5월 4일 콘스탄스 공의회는 위클리프를 정죄하였고 그 시체를 파내어 불사르도록 결정하였다. 두 달 후에는 후스는 다시 공의회에 끌려나갔다. 6명의 감독들은 후스의 제복을 벗기고 사탄의 형상으로 된 모자를 씌워준 뒤 쇠줄로 화형주에 묶였다. 후스는 “나는 오늘 내가 전한 그 복음의 신앙 안에서 즐겁게 죽을 것이다.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내게 자비를”이라고 말하면서 화형당했다. 후스가 박해당했다라는 소문이 보헤미아에 전해지자 온 나라 백성이 분노하고 후스를 나라의 영웅으로 순교자로서 숭상하였다.

이러한 일은 뒤에 독일의 개혁가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다. 루터는 종교회의에서 후스와 같은 이단이라고 공박당하였으나 루터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후스의 친구였던 프라하의 제롬은 후스가 희생당한 것을 동정하여 콘스탄스에 갔다가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한 뒤 1416년에 화형당했다. 그 뒤 보헤미아에는 폭동이 일어나 교황제도의 존속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보헤미아 형제단이라는 종교단체가 생기게 되었고 나중에 진젠도르프 백작의 지도 아래 모라비안 형제단이란 그리스도교 분파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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