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클리프 (1329~1384)

 
<목차>
종교개혁의 선구자
교황에 대한 항거
종교개혁 주장
복음을 전할 토대 마련
위클리프의 재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위클리프의 재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교계는 마침내 위클리프를 몰아부칠 결정적인 구실을 잡았다. 이 난은 부당한 인두세와 행정의 부조리에 대한 농민들의 폭발로 위클리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교계에서는 이 농민 봉기가 위클리프의 설교 때문에, 롤라드 운동의 영향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뒤집어씌웠다.

더구나 이 농민 봉기가 패하자 위클리프는 농민들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탄원함으로써 그 자신을 더 큰 곤경에 빠뜨렸다. 이 일로 교계의 주장이 기정 사실화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까지 교계로부터 그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국왕이나 귀족들이 지지를 잃게 되었다. 이제 위클리프는 더 이상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도, 설교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교수직을 박탈당한 후 위클리프는 시골 교회의 목사로 일했다. 그러면서 저술에 정력을 쏟았는데, 특히 성경 번역과 소책자를 저술하는 데 힘썼다. “만일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교회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으면 성경을 따라야 한다. 양심과 인간의 권위가 충돌할 때는 양심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기록한 그의 가장 중요한 신학 논문 ‘트리알로그’도 이 때에 집필하게 된다. 그에게 ‘복음적 박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는 저술을 해나갈수록 점점 더 성경을 중심삼아 이론을 전개하였다.

1384년 12월 31일, 위클리프는 2년여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그에 대한 박해는 그치지 않았다. 그가 남긴 백 수십 편의 저서들은 발매 금지를 당하였고 이단분형령(異端焚刑令)이 통과(1401년)되어 눈에 띄는 대로 불태워졌다. 그리고 위클리프는 1415년 열린 콘스탄스 종교회의에서 이단이라는 선고를 받음으로써 죽은 지 31년만에 그가 저술한 책과 함께 불태워져 두 번 죽었다.

그러나 위클리프가 떨어뜨리고 간 종교개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이후의 종교개혁가들치고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명실공히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토마스 퓰러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위클리프의 뼈를 불사르어 근처에 있는 시내의 급류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그 시내는 그 재를 아본 강으로, 아본 강은 그것을 세버른 강으로, 세버른 강은 그것을 좁은 바다로, 다시 이 좁은 바다는 이 재를 큰 대양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교리의 상징인 재는 이제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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