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클리프 (1329~1384)

 
<목차>
종교개혁의 선구자
교황에 대한 항거
종교개혁 주장
복음을 전할 토대 마련
위클리프의 재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교황에 대한 항거

1329년 영국의 요크셔 주 위클리프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위클리프. 그는 성경을 중심삼아 이론을 전개하는 저술가요, 성경을 토대로 청중들을 감화시키는 종교개혁 이전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으며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강의한 학자요, 루터보다 140년 앞서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성경 번역가였다. 때문에 ‘개혁의 샛별’이니 ‘복음적 박사’니 ‘옥스퍼드의 꽃’이니 하는 등의 명예로운 칭호를 가졌던 그였다. 그러나 그 찬란한 칭호들만큼 그는 세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영달을 누리지는 못했다.

옥스퍼드 베지얼 칼리지에서 신학/철학/법률을 공부한 그는 1360년 동대학의 학장이 되어 철학을 강의하던 중 1366년 영국 왕실의 전속 신부가 된다. 전부터 교황의 무조건적인 권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교황 제도의 실정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왕의 특사로 교황의 대표와 만나 영국 교회의 교직자를 보충할 문제에 대해 의논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위클리프는 교황에 대한 임직세 제도 즉, 조공제도와 교황의 임직 보류권 남용을 직접 목도하게 된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교황의 세속적인 통치권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교황이 영국 국왕에게 요구하는 조공의 불합리성과 영국에 미치는 교황의 정치적 영향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임을 천명하였다. 당시 교황청은 프랑스의 아비뇽에 있었고 교황은 프랑스의 정부 시책에 발맞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으면서 교황청의 탐욕스런 강제 징수에 대해 불만을 느껴오던 영국인들에게 있어서 위클리프의 이러한 주장은 한여름의 시원한 소나기였다. 결국 그의 주장은 영국의 국왕과 귀족들로 하여금 똘똘 뭉쳐 교황청의 각종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게 하였다.

이처럼 위클리프는 처음에 애국적인 입장에서 교황의 횡포에 항거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종교개혁쪽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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