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354~430)

 
<목차>
구원으로 이르게 한 그 복된 죄여!
놀기 좋아했던 소년
욕망으로 불탔던 청년시절
카르타고에서 마니교에 빠져
어거스틴의 성찰
신의 본성을 새로이 이해하며
자기반성 - 그 끝없는 고뇌
채찍으로 파견된 폰티키아누스
죄의 굴에서 벗어나 회심으로
세례 그리고 모니카의 죽음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어거스틴의 성찰

383년 어거스티는 모니카의 간곡한 권유로 로마에 정착하였다. 그러다가 다음 해에 더 큰 포부를 가지고 밀란으로 가서 수사학 교수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마니교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암브로스 대주교의 설교를 접하게 되었다. 점차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을 새로운 눈으로 읽게 되었다. 그는 암브로스가 교인들에게 하는 설교에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린도후서 3:6) 라는 성경구절을 성경 해석의 규범으로 삼는 것을 흥미로운 마음으로 듣게 되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매일매일 세례받기를 합당한 생활을 해가고 있음을 기뻐했다. 그녀는 어거스틴이 일단 정식으로 결혼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희망을 갖고 있었다. 결혼 준비가 추진되었다. 어거스틴은 2살 아래인 여자가 마음에 들어 약혼을 하였다. 13년 동안 동거했던 여자는 다시 다른 남자와 살지 않겠노라며 아프리카로 발길을 돌렸다.

  어거스틴은 약혼 기간인 2년도 참고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또 다른 여자를 찾았다. 그러나 그를 더이상 육체적 쾌락의 심연에 더 깊숙이 빠져들지 못하게 한 방패가 있었으니 죽음과 장차 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친구 알리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와 함께 선과 악의 본성에 대해 토의하기까지 했다. 그가 만일, 죽은 후에도 영혼이 생존하여 그 업적에 따라 상벌을 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에피쿠로스(기원 342~270에 살았던 희랍의 향락주의 철학자)가 그의 안에서 승리했을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진흙탕에 빠져, 목적으로 삼고 사랑해야 할 덕과 미의 빛을 식별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이 평안히 쉴 수 있는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는 듯 싶었다.

  “달려오너라, 내가 너를 붙잡아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마. 거기에 가서도 내가 너를 붙잡아주마”

  죄악의 늪에서 헤매었던 어거스틴. 그는 청년기에 들어서 비로소 하나님의 유일할 존재를 믿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는 생명이 다시는 하나님을 끝없이 무한한 공간에 두루 퍼져 있는 물질적인 실체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에 따른다면 코끼리의 몸은 참새의 몸보다 부피가 크므로 하나님께서 참새보다 코끼리의 몸에 더 많이 임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거스틴은 아직 주님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두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지으신 이가 주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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