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신 찬

 
<목차>
주일학교 학생으로
어머니와의 사별
대동아 전쟁 발발
타향 길
해방의 기쁜 소식
10. 1 사태
신학생이 되기까지
신학교 생활에서 느낀 환멸
목회의 시작
나는 위선자였다
대구 칠성교회로
새로운 계기가 된 집회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다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나는 위선자였다 (1)

그 즈음 나는 마음에 심한 갈등이 있었다. 교회가 이렇게 부패하고 목사들이 권력이나 명예에 눈이 어두워 서로 싸우고 있으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젊은이로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의 일이기는 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는 독야청청하리라. 혼자만이라도 성경대로 살리라’ 하고 성경을 읽던 중에 문제에 걸리고 말았다. 마태복음 22장 3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에 대해서 나는 자신을 잃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본 부친의 모습을 통해 무의식 속에서 참된 신앙생활의 이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부친은 무식하고 가난한 촌로이기는 해도 생각만은 올바른 분이셨다. 내가 일곱, 여덟 살 때 어떤 불쌍한 거지가 밥을 얻으러 왔었다. 그때가 겨울철 저녁이었다. 문을 여시고 거지를 한참 보시더니 추우냐고 물으셨다. “예, 춥습니다.” 하면서 거지는 떨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는 지체 없이 솜저고리를 벗어 덮어 주시면서 입고 가라고 하셨다. 어떤 때는 거지를 방으로 불러들여 윗목에서 며칠을 재워 보내기도 하셨다. 거지에게서 떨어진 이가 방에 기어 다니기도 했다. 어떤 신자의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들으면 도울 길이 있으면 당장에 돕고, 도울 길이 없으면 밤을 새워 울면서 기도를 하셨다.

내 고향은 동해안이라 한국전쟁 때 피난 나온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거쳐 갔는데 교인들은 교회를 찾아왔다. 우리 집이 바로 교회와 한마당이라 우리 집 사랑방에는 항상 함경도 피난민으로 차 있었다. 어떤 때는 부친께서 피난민들의 임시 숙소를 찾아가서 비밀히 쌀 그릇을 조사한 뒤 쌀이 없으면 쌀을 거두어서 가져다주시곤 하셨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으나 여러 가지 얽힌 이야기가 많이 있다. 나는 이런 부친 슬하에서 자라면서 저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마음에 믿고 그 이상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생 때부터 꿈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으니 갈등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리라고 작정했지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주님의 말씀에서 내가 과연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가 반문해 보았다. 그리고 부친 생각이 나서 부친처럼 살기로 결심했다. 나도 양복을 벗어 불쌍한 사람에게 주었는데 나중에 옷걸이를 보니 헌 옷은 나누어주고 새 옷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날 고학생이 찾아왔는데 아내가 없는 틈을 타서 큰 자루에 쌀을 퍼 주었다. 아내가 들어오다가 고학생이 쌀을 메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싸움이 벌어져 5일간을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거지들이 동냥 오면 한 끼 먹을 돈을 주자고 결정하고 있었으나 줄 수 없을 때가 많아서 작은 동전을 주면서 “미안하다. 이것밖에 없어.” 하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지만 내 마음에는 가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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