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신 찬

 
<목차>
주일학교 학생으로
어머니와의 사별
대동아 전쟁 발발
타향 길
해방의 기쁜 소식
10. 1 사태
신학생이 되기까지
신학교 생활에서 느낀 환멸
목회의 시작
나는 위선자였다
대구 칠성교회로
새로운 계기가 된 집회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다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신학생이 되기까지

그때 기독교계에는 서울조선신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수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51명의 신학생들이 김재준 교수는 신신학자라고 반기를 들고 총회에 제소하여 김재준 교수가 정죄되었다. 그리고 해방 전에 만주 봉천에서 신학교를 하다가 해방 후에 고려신학교로 옮겨 온 박형용 박사를 모셔다가 장로회 신학교(평양신학의 계승이라 함)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박형용 박사의 제자였던 강용서 목사가 내 고향 교회에 시무하러 오셨다. 그래서 강 목사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에게 “나도 신학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때 강 목사는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권 집사는 얼마든지 신학을 할 수 있습니다. 정규적인 중학 과정을 밟지 못했으니(일제 시대에는 중학교가 5년제로 지금의 고등학교 정도였다) 검정고시를 치르면 입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며 용기를 주었다. 자기가 신학교에 연락해서 입학 수속과 검정고시에 대한 수속 자료를 보내게 할 터이니 염려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일은 쉽지가 않았다. 아내가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것이다. 목사는 세상과 물질에 대하여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하니 어찌 그 가난과 고생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신학을 한다면 자살할 것이라고 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며 나의 천직이라 생각해 왔기 때문에 아내의 반대는 개의치 않았다.

그 무렵 내 형편은 전보다 좀 나아져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정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그때까지 경작하던 땅이 소작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농토가 생긴 것이다. 또 토지를 구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활이 나아진 것은 형의 노력 덕분이었다. 내 앞으로는 논 500평 정도가 배당되었다. 그것이 나의 전 재산이었다. 그것을 팔아서 서울에 있는 강용서 목사의 성냥 공장에 맡겨 놓고 학비를 타 쓰며 아내와 1남 1녀 세 식구는 형님 집에 맡겨 두고 신학교에 가기로 했다. 심하게 반대하던 아내는 할 수 없이 후퇴하고 말았다. 나는 결국 검정고시를 거쳐서 신학교에 들어갔다. 본과는 신학자가 되는 과정이고 전문과는 목사가 되는 과정인데 나는 전문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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