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신 찬

 
<목차>
주일학교 학생으로
어머니와의 사별
대동아 전쟁 발발
타향 길
해방의 기쁜 소식
10. 1 사태
신학생이 되기까지
신학교 생활에서 느낀 환멸
목회의 시작
나는 위선자였다
대구 칠성교회로
새로운 계기가 된 집회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다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해방의 기쁜 소식

내 나이 스물두 살. 동리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전기회사의 일을 보는 직원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8월 14일 밤에 일본 천황이 항복 선언을 했다는 전화 연락을 받은 그 직원은 밤중에 그 소식을 전해 주었다. 꿈 같은 일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그 결과 천황이 항복을 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동리에 남아 있던 청년들을 동원하여 산 넘어 동리 동리로 돌아다니면서 만세를 부르며 밤을 새웠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기뻐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독립의 기쁨을 가라앉힐 길을 찾지 못하여 나는 연극 각본을 한 달 동안 쓰고 청년들을 동원시켜 한 달간 연습을 시켰다. 아마추어 연극단을 만들어 이 동리, 저 동리를 돌면서 연극을 보여주었는데 ‘빛나는 독립 청년’이라는 제목이었다. 잘 된 연극은 아니었으나 연극을 별로 보지 못한 시골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재미있고 뜻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여운형 선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있던 지역에서는 김세영 목사가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공산당의 술책이었으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 독립정부인 줄 알고 인민위원회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김 목사는 자신이 정부에서 임명한 그 지역의 장이라도 되는 줄 알고 매일 6킬로미터나 떨어진 면소재지에 출근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통 정부도 아니며 공산주의 색채가 짙다는 소문이 차츰 들려왔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양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사태를 주시하기로 했다.

객지 생활을 하느라 때로는 일 년 이상 교회에 나가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한 번도 버리지 않았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해에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집사직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었고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을 조직하고 각처에 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등 반공 운동을 전개했다. 그중 대여섯 명이 우리 마을에도 찾아왔다. 나는 식사를 제공하고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반공 강연을 하게 했다. 정치가가 되고자 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았다. 무신론에 대항해서 싸운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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