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신 찬

 
<목차>
주일학교 학생으로
어머니와의 사별
대동아 전쟁 발발
타향 길
해방의 기쁜 소식
10. 1 사태
신학생이 되기까지
신학교 생활에서 느낀 환멸
목회의 시작
나는 위선자였다
대구 칠성교회로
새로운 계기가 된 집회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다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타향 길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아버지와 당숙께서는 내게 좋은 처녀가 있으니 결혼을 하라고 하셨다. 세상 경험도 없고 식구를 먹여 살릴 경제력도 없는 내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리였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으나 어른들의 꾸지람과 형님 식구들이 다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따르기로 했다. 결혼할 상대는 당숙의 친구 되시는 분의 막내딸이었다. 그 아가씨는 인물이 꽃봉우리 같다고 모두들 탐을 내고 있었다. 큰 부잣집에서도 청혼이 들어와 사윗감을 고르고 있던 차에 청혼이 들어간 것이다. 우리 집은 비록 가난했어도 천국에 가려면 권 장로같이 믿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군 내에서는 믿음의 가정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그쪽에서 상당한 매력을 느낀 것 같다. 또 18, 19세를 지나면 혼기를 놓치게 되고, 일본 정부에서 한국 처녀들을 차출해서 정신대(일본군 위안부)로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을 때였기에 더욱 결혼을 서둘렀다. 해가 바뀌어 내 나이 20세, 신부 나이 19세 되던 해 이른 봄날 결혼식을 올렸다.

고향에 있다 보면 언제 일본 사람에게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라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나가기로 했다. 그때 마침 누님이 남편과 서울로 이사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갓 시집온 신부를 고향에 두고 떠나는 것이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디든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데려오리라 생각하고 떠났다.그러나 세상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울까지 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중에 김포읍에서 살게 되었다. 거기서 어떤 형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고향 쪽 사람이라 친근히 대해 주었다. 내 사정을 말하고 보호해 주기를 부탁했다. 김포읍에서는 일정한 주민등록도 없이 살고 있었으니 식량 배급도 탈 수 없었다. 가끔씩 근처 시골로 가서 식량을 얻어다 겨우 연명했는데, 어떤 날은 시골에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논두렁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내게는 없는 것이 세 가지였다. 고향과 어머니, 그리고 조국. 어머니 생각이 가시지 않았고 일제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객지로 떠도는 내 신세가 한스러워 울고 또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사가 찾아와서 자신이 건수를 올려야 진급을 하는데 통 진급할 수 없으니 주변에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즉 밀고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죽어도 그런 짓은 할 수 없었고 협조하지 않으면 나를 고발해서 끌려가게 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버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포에 그대로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할 것 같아 떠나기로 결심하고 시골의 처가 동리로 내려갔다. 아내는 거기서 딸을 낳아서 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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