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신 찬

 
<목차>
주일학교 학생으로
어머니와의 사별
대동아 전쟁 발발
타향 길
해방의 기쁜 소식
10. 1 사태
신학생이 되기까지
신학교 생활에서 느낀 환멸
목회의 시작
나는 위선자였다
대구 칠성교회로
새로운 계기가 된 집회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다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어거스틴 (354 ~ 430)
- 존 위클리프 (1329 ~ 1384)
- 존 후스 (1369 ~ 1415)
- 마르틴 루터 (1483 ~ 1546)
- 울리히 츠빙글리 (1484 ~ 1531)
<국내의 다른 인물들>
- 권신찬

 
 
 
 

어머니와의 사별

내가 열두 살 때(당시 4학년), 어머니께서 49세의 늦은 나이에 둘째 동생을 낳으셨다.
우리는, 여덟 살 위인 누나와 세 살 위인 형, 여섯 살 아래인 여동생까지 모두 4남매였다. 뒤늦게 쌍둥이 동생을 낳으셨는데 새로 난 동생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쌍둥이를 분만한 어머니께서도 어쩐 일인지 병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지금 같으면 병원에 가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겠지만, 그곳은 산파도 없는 시골이었다. 설령 병원이 있다 하더라도 돈을 낼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었다.결국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관이 땅에 묻힐 때는 나도 들어간다고 하며 울고 또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막연하기는 했으나 부활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부활 때에 반가운 얼굴로 어머니를 다시 만날 것이라 생각하고 겨우 견딜 수는 있었으나, 정말 어머니 없는 세상은 캄캄하고 처절하며 앞날의 희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나의 슬픔도 컸지만 아버지의 슬퍼하시는 모습 또한 형용할 수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오신 후에 밖에 서서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해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한숨짓고 실성한 사람처럼,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내가 어떻게 살라고 먼저 가 버린단 말이오.” 하시면서 계속 우시는 그 모습은 정말 너무 불쌍해 보였고 처량해서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항상 어머니께 귀여움만 받으며 살던 나의 생활은 끝이 났다. 얼마 후에 18세 밖에 안 되는 형이 결혼을 했다. 누님도 시집을 가 버리고 집에 여자라곤 어린 여동생뿐이었다. 살림을 맡을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형이 일찍 장가를 갔는데 형수는 성품이 착하고 참을성이 있고 효성스런 여성으로 홀아비 된 아버지를 잘 모시고 살아갔다. 그때 우리집에는 방이 두 개 밖에 없었는데 방 하나는 형님 가족이 쓰고 다른 하나는 나와 여동생 그리고 아버지가 함께 쓰게 되었다. 한 방을 쓰게 되니 자연히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 말을 듣게 되었다. 나와 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은 예배당과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어 방안에서도 설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방에 누워 계시면서 내게 “설교란 생활이 뒤따라야 힘이 있는 것이다. 행실이 설교와 일치하지 않으면 힘이 없고 감동을 줄 수 없다.” 라고 하셨다. 언젠가 너는 자라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나도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았다. 그 말씀은 오랜 후에 내가 목사가 되었을 때 목회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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